행복기행

(5) 세입자들의 천국 베를린

베를린 | 글·사진 김세훈 기자

월세 계약 무기한…집주인 마음대로 “나가라” 못해

“집세가 영혼 갉아먹는다” 세입자들 힘 합쳐 월세정책 바꿔

독일 베를린 코펜하겐 거리 46번지. 요리사 스벤 피셔(45)가 사는 건물은 공사 중이었다. 건물 외관은 마무리 공사가 덜 됐다.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벽돌과 시멘트가 널려 있었다. 내부 엘리베이터 공사는 시작도 못했다. 이곳 4층과 2층에 피셔의 가족이 9년째 살고 있다. 4층은 피셔만의 공간이고, 2층은 아내와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피셔가 머무는 4층은 흉가와 같았다. 화장실 벽은 무너졌고 굴뚝도 내려앉았다. 침대에는 뿌연 먼지가 덮여 있었다. 피셔는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해온 새로운 집주인과 1년 넘게 싸우고 있다”며 “9개월 전 끊긴 전기는 다시 얻어냈지만 가스와 물은 오래전부터 끊겼다”고 말했다.

<b>동네 사람들이 한데 뭉쳤다</b> 독일 베를린 코펜하겐 거리 46번지는 요리사 스벤 피셔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던 임대주택이었으나 건설회사가 건물을 사들이면서 세입자들이 쫓겨날 처지가 됐다. 피셔는 세입자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임대료를 높여 받으려는 새 건물주에 맞서 싸우고 있다. 지난해 여름 피셔와 세입자들이 건물 앞에 모여 포즈를 취했다.  스벤 피셔 제공

동네 사람들이 한데 뭉쳤다 독일 베를린 코펜하겐 거리 46번지는 요리사 스벤 피셔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던 임대주택이었으나 건설회사가 건물을 사들이면서 세입자들이 쫓겨날 처지가 됐다. 피셔는 세입자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임대료를 높여 받으려는 새 건물주에 맞서 싸우고 있다. 지난해 여름 피셔와 세입자들이 건물 앞에 모여 포즈를 취했다. 스벤 피셔 제공

2014년 12월 이 건물을 인수한 건설회사는 세입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명목상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리노베이션. 건설회사는 “리모델링을 마치면 월세가 3배 이상 뛴다”면서 “지불할 수 없으면 떠나라”며 공사를 강행했다. 피셔는 “실제로는 고급주택으로 개조해 비싸게 팔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행복기행](5) 세입자들의 천국 베를린

피셔가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딸들 때문이다. 11세, 14세인 두 딸은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한다. 피셔가 사정을 알렸지만 집주인은 요지부동. 피셔는 “집주인의 통보는 물론 합법적이지만 우리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세입자들과 함께 저항했다. 정치인과 공무원에게도 처지를 호소했다. 언론을 통해서도 관심을 구했다. 그러나 평행선을 달리는 싸움에 지친 세입자들은 하나둘 떠났다. 처음 어른 40명, 아이 16명. 지금은 피셔 가족을 포함해 6명만 남았다.

피셔는 “지난해 여름밤 갑자기 굴뚝이 내려앉았다. 또 누군가 내 오토바이 기름 통에 설탕물을 부었다”며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두 딸과 아내가 사는 2층 집은 청소년보호규정 덕분에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마지막 세입자’의 투쟁

피셔의 투쟁은 언론을 통해 독일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먼지 속 분노’ ‘우울한 크리스마스’ 등으로 보도됐다. 언론들은 피셔에게 ‘마지막 세입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피셔는 “지금은 감정싸움까지 겹쳐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없어졌다”며 “우리 가족의 얼굴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기 때문에 집주인도 우리를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언론 타게스슈피겔은 “피셔는 주택 현대화와 세입자 퇴출 사이의 갈등이 표출된 완벽한 사례”라며 “피셔는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테러를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b>“마지막 세입자”</b> 독일 언론들이 ‘마지막 세입자’라는 별명을 붙인 스벤 피셔

“마지막 세입자” 독일 언론들이 ‘마지막 세입자’라는 별명을 붙인 스벤 피셔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비짐 바칼’이라는 채소가게도 상황은 비슷하다. 비짐 바칼은 1987년 터키에서 온 아흐메 찰리스칸(56)이 아버지와 함께 연 상점이다. 같은 장소에서 29년 동안 운영해왔다. 비짐 바칼은 터키어로 ‘우리 가게’라는 뜻이다. 찰리스칸은 2015년 3월 새로운 집주인으로부터 임대계약 해지 요구를 받았다. 집주인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부동산 회사다. 찰리스칸은 “우리 가게가 있는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한 뒤 비싸게 임대하려 했다”며 “나는 가게를 계속 운영하고 싶어 임대료를 올려 내겠다고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현지 언론들에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우울하다’는 제목의 기사와 건축도구가 어지럽게 널린 방안에 있는 피셔 부부의 사진이 실렸다.

지난해 12월 현지 언론들에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우울하다’는 제목의 기사와 건축도구가 어지럽게 널린 방안에 있는 피셔 부부의 사진이 실렸다.

그때부터 싸움은 시작됐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한데 뭉쳤다. 그해 6월3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사람은 150여명이나 됐다. 이들은 소식지를 만들어 사정을 알렸고 언론을 통해 관심을 호소했다. 수요일 저녁마다 가게 앞에서 정기모임도 가졌다. 의자와 담요 따위를 가져와 앉아서 음식을 나눠 먹었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도 불렀다. “비짐 바칼은 남는다”는 현수막도 내걸었다. 소풍과 같은 모임에 한때 1000여명이 모이기도 했다.

기자가 취재를 간 때는 눈비가 내린 1월의 추운 수요일 밤이었다. 그날 밤에도 30여명이 모여 와인에 향신료를 넣어 데운 글뤼바인 등을 나눠 먹으며 그간 진행된 상황을 공유했다. 갓난 딸을 데리고 나온 32세 주부는 “수요일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왔다”며 “우리와 함께 같은 곳에서 오래 산 사람을 돕기 위해 나왔을 뿐, 가게 주인인 찰리스칸이 우리에게 특별히 잘해줘서 나온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학생·이민자 몰려 임대료 ‘껑충’

베를린은 ‘세입자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전체 인구의 85%가 세입자다. 독일 전체 평균 세입자 비율인 57%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베를린도 완성된 천국은 아니다. 베를린은 최근 10년 동안 월세가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독일 도시 중 임대료 인상폭이 가장 크다. 외국인 유학생들과 이민자가 몰려오면서 주택 수요도 급증했다.

베딩은 저소득층이 주로 사는 곳이다. 이곳의 5층 건물 꼭대기 층에 사는 안드레아스 폴(42)은 화가다. 그는 2008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76㎡ 크기에 방이 3개 있는 집. 처음 월세는 479유로였는데 지금은 두 배 가까이 올라 750유로(약 98만원)다. ‘미트슈피겔’이라는 월세인상기준표에 맞춘 인상이었다. 미트슈피겔은 위치, 설비, 건축연도 등을 기준으로 2년에 한 번씩 월세 인상폭을 법으로 정한 표다. 폴은 “시설은 좋아진 게 없는데 집주인이 미트슈피겔을 근거로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니 받아들여야 했다”고 말했다.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정임대료를 제시한 미트슈피겔이 오히려 집세 인상의 근거가 된 꼴이다.

안정된 주거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돈 문제뿐 아니라 삶의 질 전체가 집과 이어져 있다.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면 지역사회와의 연결이 끊기고, 너나없이 뜨내기들이 된다. 단골 가게, 집집마다 반찬을 나눠 먹는 골목길 문화, 따스한 이웃들 따위는 이사 물결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본 네트워크가 무너지는 것이다. 한국인들 소망이 돼버린 ‘내집 마련’, 아파트 값이 올라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되는 일확천금의 꿈은 이제 고도성장기의 빛바랜 추억이 돼버렸다.

전세 보증금이 뛰어올라 2년마다 메뚜기처럼 옮겨다녀야 하는 한국의 세입자들 눈에는 베를린의 임대료 인상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폴에게 “한국 세입자들은 2년마다 이사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더니, 그는 “반사회적인 범죄”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유학생 조지 워커(38)는 8년 전 독일로 왔다. 학생 신분으로 집을 구하기 힘들어 처음에는 작은 펜션에서 기거했다. 처음엔 18개월 공부 기간 중 6개월을 집 구하는 데 썼다. 워커는 “반년 동안 집주인들로부터 아마 열 번은 퇴짜를 맞았을 것”이라면서 “독일어도 잘 못했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었으며 애까지 있으니 집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6년 전 베를린으로 와서 아파트 형태의 기숙사 9층에서 살고 있다. 워커의 집에는 방이 3개 있고 크기는 77㎡다. 월세는 집세와 관리비까지 합해 매월 510유로(약 67만원)다. 워커는 “학생이라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기숙사에서 살 수 있다”며 “학생 신분을 잃으면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월세 계약은 ‘무기한’인 독일

독일에서 월세 계약 기간은 기본적으로 무기한이다. 1년, 2년 등 일정한 기간에 월세를 순차적으로 올리는 계약은 있지만 계약기간을 한정적으로 못 박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집주인은 자신이 직접 살거나, 오래된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리모델링을 할 경우가 아니면 세입자들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세입자가 만일 리모델링 후에도 계속 살고 싶다고 하면 리모델링 비용의 10% 안팎을 집세에 얹어서 내면 된다. 피셔나 찰리스칸처럼 터전을 지키기 위해 부동산회사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과 비교하면 세입자들의 권리는 막강하다. 한국에서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나돌고 초등학생들이 장래 희망으로 “건물주”를 써낸다지만, 독일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폴의 말처럼 ‘반사회적인 범죄’로 여겨질 수 있다. 세입자 천국 베를린을 만드는 것은 주거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이 늘 벌어지고,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b>베를린의 수요집회 “비짐 바칼은 남는다”</b> 진눈깨비가 내린 지난 1월13일 밤, 독일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터키 이민자 아흐메 찰리스칸의 채소가게 ‘비짐 바칼’ 앞에 동네 주민 30여명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건물주의 퇴거 요구에 맞선 찰리스칸의 싸움을 지지하는 수요 정기집회를 하고 있다.

베를린의 수요집회 “비짐 바칼은 남는다” 진눈깨비가 내린 지난 1월13일 밤, 독일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터키 이민자 아흐메 찰리스칸의 채소가게 ‘비짐 바칼’ 앞에 동네 주민 30여명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건물주의 퇴거 요구에 맞선 찰리스칸의 싸움을 지지하는 수요 정기집회를 하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월세인상폭을 제한하는 또 다른 조치가 취해졌다. 집세를 올릴 때 주변 지역 평균보다 10%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기존 주택에 새로운 세입자를 들일 때만 적용됐다. 신규 주택을 처음으로 임대할 때, 건물을 전면수리한 뒤 첫 세입자를 받을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세입자가 아니라 건설업체, 집주인을 위한 조치였다. 집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합법적으로’ 월세를 올릴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다.

베를린에는 세입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과 조언을 해주는 베를린세입자협회가 있다. 베를린 전체 가구 중 7%인 16만가구가 회원이다. 회비는 월 9유로씩 1년에 108유로인데 저소득자는 54유로만 내면 된다. 사무실 입구에는 ‘학생을 위한 임차권’ ‘주택 리노베이션’ ‘주택 하자 발생 시 월세 인하’ ‘이사비용 절약법’ ‘에너지 절약을 위한 팁’ ‘세입자의 권리와 의무’ ‘계약해지 및 세입자보호’ 등 다양한 브로셔가 비치돼 있다.

한 32세 주부는 갓난아이를 집회에 데리고 나왔다.

한 32세 주부는 갓난아이를 집회에 데리고 나왔다.

세입자협회의 라이너 빌트 사무총장은 관리비 정산이 불투명한 것, 주택에 결함이 있어도 제때 수리를 해주지 않는 것, 무리한 월세 인상 요구, 이사 문제, 계약해지 등 5가지를 세입자들의 주요 고민거리로 꼽았다. 세입자들은 1년치 관리비를 미리 계산해 집주인과 계약하고 12개월 분할로 다달이 낸다. 그리고 1년 뒤에 실제 비용과 비교해 재정산한다. 실제로 돈이 더 들어갔으니 관리비를 더 내라는 집주인 요구에 세입자가 못 내겠다고 버티는 게 가장 잦은 분쟁이다.

빌트 사무총장은 “집주인은 법적으로 15개월마다 한 번씩 집세 인상을 요구할 수 있고 세입자는 월세를 한 달이라도 못 내면 계약해지 경고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세입자의 월세는 ㎡당 6유로 선인 반면 신규 세입자는 9유로 안팎을 내야 한다. 빌트 총장은 “신규 세입자의 걱정이 더 크다”며 “베를린 인구는 매년 4만명씩 느는데 주택은 10만채가 부족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세입자 선별, ‘까다로운 캐스팅’

협회 직원 빕케 베르너(38)도 세입자다. 그는 55㎡ 크기에 방이 2개인 곳에서 혼자 산다. 월세는 600유로다. 그는 “지금 사는 곳이 네 번째 집인데 집을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며 “실업자,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훨씬 더 힘들다”고 걱정했다. 그는 “3년 동안 집세인상폭을 최대 15%로 제한하는 법도 있지만 예외조항이 많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시 정부는 저렴한 사회주택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10년 동안 30% 안팎 증가한 외국 유학생도 월세 인상의 한 요인이다. 베를린의 대학 교육은 무료다. 학생들은 다양한 혜택을 받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외국 유학생이 300만명에 육박하면서 주택난도 가중됐다. 베를린자유대학교 건물 게시판에도 집을 구한다는 내용이 적힌 쪽지들이 눈에 띄었다. 최근에는 방이 여럿 있는 집을 빌려 함께 살 룸메이트를 구하는 이들이 급증했다. 치솟는 월세를 공동주거로 감당하려는 움직임이다.

“방 1개, 월세 500유로, 40㎡ 크기, 냉장고와 세탁기 있음, 학교에서 5분 거리.” “같이 살 여학생 구함, 집 크기는 80㎡, 월세는 700유로.” “인턴으로 일하는 중국여성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욕실도 깔끔하게 씀.” “크기 43㎡인 5층 집, 담배 피움.”

코티운트코 사무실 근처 벽에 “우리 모두 여기에 머물고 있다(WIR BLEIBEN ALLE)” 등의 문구가 적힌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코티운트코 사무실 근처 벽에 “우리 모두 여기에 머물고 있다(WIR BLEIBEN ALLE)” 등의 문구가 적힌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독일에서는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하지만 갈수록 젊은이들은 방을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상점 판매원 마리아 뢰리히(23)는 “2년 전 독립해 친구 2명과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방 3개가 있는 96㎡ 크기 집이다. 전체 월세는 845유로인데 방 크기에 따라 330유로, 270유로, 245유로를 각각 낸다. 270유로를 내는 뢰리히는 “실질적으로 큰 집에서 사는 것과 같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까다로운 캐스팅을 통과했다”고 말할 정도다. 세입자의 권리가 강하게 보장되는 만큼 집주인은 아주 까다롭게 세입자를 고른다. 한국은 세입자 1명이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니지만 베를린에서는 집주인이 집을 공개하는 시간에 맞춰 많은 세입자들이 동시에 몰린다. 집주인은 그들 중 자기 입맛에 맞는 세입자를 고르면 된다. 적당한 세입자가 없을 경우 다음 기회로 넘기면 그만이다. 또 요즘 집주인들은 외국 관광객에게 단기간 집을 빌려주는 것을 선호한다. 수익이 높은 데다 세입자와의 문제 소지도 적기 때문이다. 한 40대 남성은 “그래도 1만1000여명에 이르는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보호받아야 하지 않느냐”며 “시 정부는 공항, 박물관을 짓는 것처럼 사회주택을 건설하는 데도 돈을 많이 써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주택은 독일 정부가 2차세계대전 직후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었다. 요즘은 월세 일부를 시 정부가 보전해주는 집을 그렇게 부른다. 사회주택이라 해서 시설이 낙후되거나 환경이 열악한 것은 아니다. 외관상으로도 전혀 구별이 안된다. 그러나 이 같은 주택시장 공공성도 해외자본이 들어오면서 흔들리고 있다. 1970년 간호사로 독일로 온 변영지씨(70)는 “집주인과의 갈등이 적고 집세만 잘 내면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에 ‘집 없는 설움’은 없었다”면서도 “그러나 자본주의 풍조가 강해지면서 베를린도 언젠가는 런던, 파리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다.

<b>‘세입자들의 힘</b>’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코트부서토어에 있는 코티운트코 사무실. 지난 1월 나무집으로 된 사무실 앞에 세워진 간판에 세입자들의 요구가 적혀 있고, 사무실 외벽에도 “㎡당 월세 4유로로 당장 인하” 등의 문구가 붙어 있다.

‘세입자들의 힘’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코트부서토어에 있는 코티운트코 사무실. 지난 1월 나무집으로 된 사무실 앞에 세워진 간판에 세입자들의 요구가 적혀 있고, 사무실 외벽에도 “㎡당 월세 4유로로 당장 인하” 등의 문구가 붙어 있다.

■세입자들 힘 보여준 ‘코티운트코’

베를린 세입자들은 자본주의 욕망에 맞서 힘을 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사례가 있다. 크로이츠베르크 코트부서토어에서 세입자 투표로 정책을 바꾼 코티운트코다. 코트부서토어는 통일 전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거주한 곳이다. 이곳 주택들은 2차대전으로 심하게 파괴됐다. 1964년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오래 비워진 건물에 대한 세입자들의 점거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곳 월세는 시정부 소유 사회주택이 부동산 관리 회사로 넘어가면서 폭등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 고급주택으로 바뀌면서 쫓겨날 처지에 몰린 세입자들은 저항했다. 이들은 2013년 중순 작은 나무집을 짓고 ‘게체콘두’라고 불렀다. 터키어로 ‘밤사이 지어진’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터키의 슬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주민들은 프라이팬, 냄비, 호루라기를 가져와 ‘소음 시위’를 벌이다가 고급주택 건설 반대를 위한 세입자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4월11일 1차 세입자 투표가 진행됐다. 정부 정책을 바꾸기 위한 3단계 중 첫 단계였다. 찬성이 2만표 이상 나와야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무려 4만표가 나왔다. 그러자 지역 정치인들이 협상을 제의해왔고 그해 8월 아래와 같은 타협안이 도출됐다. ‘관리비를 제외한 월세가 세후 소득의 30% 이상을 넘으면 시 정부가 부담한다.’ ‘신규주택공급, 기존주택수리비 보전을 위한 펀드를 조성한다.’ ‘공동펀드로 지어진 주택 소유주는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시영건설회사 6곳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 중 55%는 시정부로부터 주택보조금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 임대돼야 한다.’ ‘시영주택 세입자는 신용정보 문제로 입주를 거부당해서는 안된다.’ ‘시영주택회사 결정에 세입자 고문단이 의무적으로 참석한다.’

<b>총리도 임대아파트에</b>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건너편 암쿠프페르그라벤 6번가에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파트. 이 건물도 임대아파트이며, 메르켈 총리와 남편 요아킴 사우어 교수는 4층에 살고 있다.

총리도 임대아파트에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건너편 암쿠프페르그라벤 6번가에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파트. 이 건물도 임대아파트이며, 메르켈 총리와 남편 요아킴 사우어 교수는 4층에 살고 있다.

코티운트코 언론담당관 로우즈베흐 타헤리는 “올 9월 시의원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우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며 “타협안에는 우리의 요구 사항 중 70~80%가 반영됐다”고 말했다. 코티운트코는 세입자 저항의 성공모델이 됐다. 독일 각지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해외 언론도 취재를 왔다. 타헤리는 “우리가 쓴 비용은 5000유로인데, 정치인들이 약속한 금액은 3억유로로 무려 6만배의 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게체콘두는 시위하는 모습을 찍은 다양한 사진, 영화 제목 <두려움이 영혼을 갉아 먹는다>를 패러디한 ‘집세가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문구 등으로 도배돼 있다. 나무집 밖에는 ‘지불 가능한 집세’ ‘월세는 세입자와 집주인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한다’ ‘정부는 사회주택을 더 지어라’ 같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근처 거리에는 ‘집값이 오르는 데 반대하는 것은 당신만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도시가 구현돼야 한다’는 문구가 쓰인 벽화도 그려졌다. 타헤리는 “가난한 지역에서 부족한 재정 문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철학으로 극복했다”며 “한국 세입자도 우리처럼 세입자 문제를 정책 과제로 이슈화해야 정치인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김세훈 장은교 김보미 박은하 정희완 김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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